예술과 사상- 칸트:미적 무관심성과 취미판단 - 대학과제

칸트:미적 무관심성과 취미판단
취미판단영역을 살펴보면, 실제로 미에 대한 미적 판단의 논리, 즉 미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과 그 의미를 묻는 질문이 판단력 비판의 중심적인 측면을 형성한다. 무관심성의 문제는 칸트에 있어서도 매우 중대한 문제였고, 후에 보게 되는 연역과도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를 분석함에 있어서 그는 이렇게 취미판단이 성질은 미감적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대상을 규정하기 위해서 판단을 적용한다. 그리고 개개의 주관이 세계내의 어떤 사태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느끼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판단이 적용되기도 한다. ‘라는 표현이 온전히 주관의 감정상태에만 관계한다는 것을 논의의 핵심으로 삼는다는 개념을 떠나서 보편적 만족의 객체로서 표상 된다고 전제하였다. 미적 만족의 무관심성은 일반적이 동의와 연관된 사실로서 보여진다. 미에 관한 판단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섞이면, 그 판단은 매우 편파적이고 또 순수한 취미판단이 되지 못한다. 취미의 문제에 있어서 심판관은 냉정해야 한다. 실상 칸트는 편견에서 해방되고, 확장되고, 일관성 있는 사고방식을 보통의 인간으로서의 격률이라 하여 상찬하였다. 취미를 고통감의 일종으로 보고, 사람들에게 자기의 판단을 전 인간이성에 견주어 볼 것을 은연중 권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판단의 주관적인 사적 조건들을 벗어나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바꿔 봄으로써 결정할 수 있는 보편적 입장에서 자신의 판단을 반성할 것을 촉구했다.
동기의 개념에서 관심의 개념이 생긴다. ‘자의란 칸트에 있어서, 대상을 산출하는 행동 능력의 의식과 결합되기 때문에, 이러한 자의의 규정근거에 관계하는 의지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대상의 실현으로 인한 쾌라고 주관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한 대상의 존재로 인한 만족은 한 대상에 대한 한정된 반성의 만족, 또는 대상의 한갓된 표상으로 인한 만족과 대치된다.
칸트의 관심이라는 것은, 그것에 의해서 이성이 실천적으로 되는 것, 즉 의지를 규정하는 원인으로 되는 어떤 것을 말한다. 이성은 그러한 행위에서 간접적 관심만을 가진다. 이성은 나중의 간접적 관심은 경험적일 뿐이고, 아무런 순수한 이성관심도 아닐 것이다. 여기서는 이성의 사용이라는 의도를 전제하고 있다. 만족, 욕망, 그리고 대상의 현존간의 복잡한 관계를 암시하였다. 욕망능력이란 그것의 표상들을 통해 이러한 표상의 대상들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이라 논하였다.
칸트의 무관심성이론은 앞에서 말한 관심적 쾌와 구별되는 무관심적 쾌가
집중되어 있다. 감각적인 쾌와 그 자체로서 좋은 것 및 유용한 것과 구별

되는 아름다움에서의 쾌를 특징화하고자 한다. 표상이 쾌,불쾌의 감정에 대해 갖는 다른 관계가 존재한다. 도구적인 선, 즉 무엇인가를 위해서 유용한 대상들로 인해 생겨나는 쾌나, 그 자체로서 좋다는 뜻에서 본래적인 가치의 대상들로 부터 생겨나는 쾌는 그 대상들의 확고한 존재에의 욕구를 자극하고, 따라서 대상들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자극한다.
미와 도덕성에서 살펴보면, 인간의 본성에 고유한 경향성 같은 경험적인 관심이나, 이성을 통해 선천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의지의 특성인 이지적 관심이 취미와 결합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사회화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사회 속에서만 인간은 자신의 방식에 따라 보다 세련된 인간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문명화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상태란, 항상 그 시초에 있어서 우호적이지 않고 오히려 야만적이고, 단순히 경쟁적임을 유의해야 한다. 모든 예술들은, 단순히 쾌적한 기술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쾌적한 기술들이란 단지 향락만을 목표로 삼는 기술이다.
목적론적 세계고찰이 다음과 같은 문제, 즉 무엇을 위하여 이 세계의 사물들은 서로 유용한가, 무엇을 위하여 어떤 사물에 있어서의 다양한 것은 이 사물 자체에 유익한가, 그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이 목적으로서 현존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는 이 세계 안에 있는 어떤 것도 무익한 것이라고는 없고, 모든 것이 자연에 있어서의 무엇인가를 위하여 유익하다고 상정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는 어떻게 가지는가하는 문제들을 매우 훌륭하게 그리고 지극히 경탄할 만큼 해결한다고 보았다.
경험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 원리들은 경험이 우리들에게 이 세계원인의 결과에 있어서 열어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특성을 추론케 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기껏해야 자연을 신의 작품을 위한 상징으로나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에게 있어서 신에 관한 우리의 인식이란 단지 상징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의 아름다운 산물에 있어서 어떤 경우에나 단지 우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의도적으로 합법칙적 질서에 따라 자신을 예술로서 그리고 목적 없는 합목적성으로 나타낸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은 우리 가 그것이라고 함을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우리에게 자연처럼 보일 때에만, 아름답다고 일컬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비록 형식적인 면에서는 예술미가 자연미를 능가하는 일이 있지만, 그러나 자연미만이 이처럼 직접적인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자연미가 예술미보다 우월하다고 본다. 즉 칸트는 자연미만이 자기의


도덕적 감정을 도야한 모든 사람의 순화된, 그리고 철저한 심적 태도와 합
치한다고 보면서, 허식과 적어도 사회적인 즐거움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 방을 떠나서 자연미로 향하는 사람의 내부에 일종의 아름다운 혼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미는 인간의 인위성이 내포되어 있지않다고 본다. 인간의 인위성이 내포되었다고 해서 자연미를 넘지 못하는 그러한 예술성을 지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자연미에 더 나은 인간의 예술성을 더한 다면 그것은 자연미에서 느낄수 없는 또다른 미를 나타내는 것이될 것이다.
자연미에 대한 이러한 직접적인 관심은 심적 태도가 선에 대해서 이미 수련을 쌓아 썩나 그렇지 않으며 이러한 수련을 특히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특유한 것임을 칸트는 누누이 반복한다. 이런 생각 뒤에는 미적 판단과 도덕적 감정 사이에 어떤 친근관계가 있다는 가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름다운 것과 도덕적으로 선한 그사이의 유비를 아름다운 것은 직접적으로 만족을 준다’, ‘아름다운 것은 일체의 관심을 떠나서 만족을 준다’, ‘상상력의 자유는 아름다운 것을 판정함에 있어서 오성의 합법칙성과 합치하는 것으로서 표징된다’, ’아름다운 것을 판정하는 주관적 원리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누구에게나 타당한 것으로 표상되지만, 그러나 어떤 보편적 개념에 의해서도 인지되지 않는 것으로서 표상된다.‘고 열거하였다.
도덕적으로 정초된 만족의 일부 형식들의 상호 주관적 타당성을 오로지 간접적으로밖에는 뒷받침하지 못하지만 도덕성의 상징으로서의 미와는 밀착되어 있다. 여기서의 상징은 일종의 종속적 표시이다. 최초의 대상은 이 대상의 상징에 불과하다. 상징들이란 개념들의 직접적인 표현들이 아니다. 상징은 그것이 상징해 내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미와 도덕성간의 관계에는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미와 도덕성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일단 자연미를 염두에 둔 것임을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볼때 자연미 뿐 아니라 예술미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미감적 이념은 그러나 본래 이성이념의 대립물인과 이는 동시에 보충을 의미할 수도 있다. 미를 통해 이성개념은 하나의 객관적인 현실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된다. 미적 이념이 심성에게 유사한 표상들의 광대한 분야에 대한 전망을 열어 줌으로써 심성에 생기를 넣어 준다고 말한다.
예술미는 자연미보다 도덕적인 이념들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좀더 많이 가질 수 있다. 미적 예술의 작품은 짐짓 꾸민 것 같이 보여서는


안되고, 따라서 어쨌든 미적 예술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의 인식능력의 놀이에서 얻어지는 자유의 감정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넓게 보아 우리로 하여금 어떤 자연물에 집착하게 만들고 충동의 질곡에 몸을 내맡김으로써 스스로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욕망의 전제, 또는 인간의 완강한 아욕으로부터 의지를 해방하는 데에 그 본질이 있는 훈육의 도야에 속할 수 있다.
취미란 도덕적 이념이 감성화된 것을 판정하는 능력이고, 취미가 이로써 도덕적 감정 이라고 불릴 수 있는 도덕적 이념에서 나오는 감정에 대한 보다 큰 감수성으로부터 유래한다 할지라도, 양자는 서로 종별적으로 구별된다. 따라서 비록 감성이 이러한 도덕적 감정과 간접적인 방식으로 합치 조정될 때에만 진정한 취미가 일정 불변의 형식을 취할 수 있음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미학은 쾌와 불쾌의 원리를 둘러싸고 전개될 수밖에 없다.
쾌적한 기술들이란 단지 향락만을 목표로 삼는 기술로서 단순히 보았는데, 쾌적한 기술을 이렇게 단순하게 보아서 식탁음악으로서의 대화의 배경으로서만 쓰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편중된 생각이라 여겨진다. 쾌적한 기술이 향락만을 위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므로 이것을 단정한 것은 편협한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의 정의나 이론적인 것으로 나타내기엔 너무 광범위한 것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판단자가 냉정해야 한다고 하지만, 어느 상황이든 매우 객관적인 것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가지는 예술을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넓어지는 부분들을 수용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예술과 사상 보고서












제출일:19951031
과 목: 예술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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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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